제7회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독일)

제7회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독일)

제7회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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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제7회 동계올림픽이 1956년 1월26일~2월4일까지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에서 개최되었다, IOC 위원장에 미국 출신의 에이버리 브린디지가 스웨덴 출신 에드스트룀 뒤를 이었다. 프랑스 위원장은 여전히 아르망 마사르였다. 이번 경기에는 32개 나라를 대표하는 821명(남 687. 여 134)의 선수가 참가했다. 대회 개회선언은 조반니 그론키(Giovanni Gronchi) 대통령이 하고, 선서는 스키선수인 줄리아나 미누초(Guiliana Minuzzo)가 맡았다. 11일의 대회기간 동안 4가지 스포츠에 속한 24개 종목의 경기가 벌어져 158,000명 가까운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72개의 메달이 주어졌다.

IOC가 제7회 동계올림픽대회를 코르티나담페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은 1949년 4월 27일로마에서 열린 제44회 회의에서였다. 이번 대회에는 이란, 볼리비아 그리고 소련 등 처음 참가한 3개나라가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소련 대표단은 7명의 여자선수를 포함하여 57명의 대규모 선수단의로 구성되었다. 덴마크,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그리고 뉴질랜드와 같은 나라들은 선수가 없어 참가하지 않았다. 서독과 동독은 독일 단일팀 이름으로 대회에 함께 참가했다. 이같이 두 개의 독일이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하는 것은 뒤 이은 스쿼밸리대회와 인스부르크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종목수는 오슬로대회와 마찬가지이지만, 시범경기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1928년 이후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종목 수는 22에서 24개로 늘어났다. 남자 크로스컨트리 종목에서 18km 경기가 15km 경기로 바뀌고 50km와 4*10km 릴레이경기에 30km 경기를 추가했으며, 여자경기에서는 10km 경기 이외에 3*5km 경기가 새로 등장했다. 이렇게 해도 이 대회에서 여자경기는 매우 소홀히 취급되었다. 남자 종목은 17개인데 비해 단지 7개 종목이 여자경기였기 때문이다.

돌로미티 산맥에 있는 암페초 경기단지는 이미 1939년 6월 9일에 1944년 동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장소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수, 임원들이 아이스링크와 경기트랙이 잘 갖춰진 경기단지를 보고 놀란 것은 그 때문이었다. 1월 26일 개회식에서는 전 세계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수백 마리의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선수 행진은 주세페 블란크가 작곡한 대회 공식 행진곡에 따라 진행되었다. 햇빛이 밝은 이날의 행사는 더할 것 없이 성공적이었으며, 돌로미티 산맥과 해발 3,221m인 크리스탈로봉의 장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이번 대회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방송 된 최초의 대회였다. 대회 전반에 대한 방송 담당은 이탈리아 국립라디오텔레비전방송사인 RAI가 맡았으며, 스키아이스하키 그리고 스케이팅 경기는 유로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처음 중계되었다. 이번 올림픽 대회에서도 IOC는 여전히 올림피아의 헤라신전에서 성화 채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를 기다려야 했다. 임시변통으로 성화는 고대 로마 발생지에서 채화되었다. 오슬로대회와 마찬가지로 성화는 코르티나에 도착하기까지 정해진 길을 따랐다. 마지막 전달자인 엔리코 콜리(Enrico Colli)가 빙속선수인 귀도 카롤리(Guido Caroli)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성화를 성화대에 점화하도록 지명된 카롤리는 1948년과 1952년 올림픽에 참가한 경력을 가진 선수였다.

이 대회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최초로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대회 초반부터 강세를 보여 금메달 7개를 포함한 16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그것도 3가지 종목 즉 스키와 아이스하키 그리고 빙속에만 출전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피겨스케이팅에는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봅슬레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피겨스케이팅의 경우 그 다음 대회에 4명의 선수를 출전시켜 이런 무관심을 잠재우는 것 같았지만, 봅슬레이의 경우 오랫동안 출전하지 않았다. 소련이 두각을 나타내는 일은 특히 빙속에서 두드러졌다. 이 부문에 걸린 4개의 금메달 가운데 3개를 소련이 차지했다.

예프게니 그리신(Yevgeny Grishin)은 500m경기에서 올림픽 기록을 갱신하고 자신의 세계신기록과 같은 기록을 내면서 2위인 라파엘 그라치(Rafael Grastch)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1,500m 경기에서도 같은 소련 선수인 유리 미하일로프(Yuri Mikhailov)와 동률로 올림픽기록을 세우면서 새로운 금메달을 땄다. 5,000m 경기에서는 보리스 실코프(Boris Shilkov)가 1위로 경기를 마치면서 그 또한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 경기에 동메달을 딴 올레그 곤차렌코(Oleg Gontscharenko)는 10,000m 경기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소련은 거의 모든 경기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그 때문인지 자기 나라 오슬로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 강세를 보였던 노르웨이는 두 개의 메달밖에 얻지 못했다. 요한센(Johansen)이 10,000m 경기에서 은메달, 예스트방(Gjestvang)이 500m 경기에서 동메달을 딴 것이 전부였다. 이번 경기에 쏟아져 나온 신기록은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수 km 떨어진 곳에 있는 미주리나 호수에 설치된 빙속 경기장 때문일 것이다.

노르딕스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세계정상급 선수들에 속했다. 소련은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했는데, 6개 경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스칸디나비아 선수들과 경합해야 했다. 파벨 콜친(Pavel Koltschin)은 15km와 30km에서 동메달을 차지했고, 50km 경기에서는 테렌티에프(Terentiev)가 역시 동메달을 차지했다. 테린티에프 콜친, 아니킨(Anikin) 그리고 쿠신(Kusin)이 참가한 4*10km 계주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2위를 차지한 핀란드를 1분이 넘는 차이로 앞선 결과였다.

여자경기에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10km 경기에서는 1, 2위를 석권했다. 류보프 코시레바(Ljuboy Kosyreva)가 금메달, 라자 예로치나(Radja Jerochina)가 은메달이었다. 3*5km 계주경기에서도 코시레바와 예로치나 그리고 콜치나(Koltschina)가 나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알파인스키에서는 큰 이변이 일어났다. 유제니아 지도로바(Eugenia Sidorova)가 1위인 스위스 르네 콜리아르(Renée Colliard), 2위인 오스트리아 레기나 쇼프(Regina Schopt)에 이어 3위를 차지하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 종목에서 소련이 새로운 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1994년 릴레함메르대회를 기다려야 했다.

아이스하키에서도 소련 팀은 승승장구하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깊은 관심을 가진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소련이 우승후보에 올랐는데. 올림픽 대회에서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한 캐나다 팀은 우승을 소련에게 내준 것은 물론 2위 자리마저도 미국에 내주고 말았다. 소련은 전체 금메달 7, 은메달 3 그리고 동메달 6을 차지하여 종합성적 1위를 차지했다.

제7회 동계올림픽 막판에 이르러 젊은 오스트리아 선수인 1935년생 토니 자일러(Toni Sailer)가 알파인스키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코르티나담 페초 대회에 등장했을 때 그의 나이는 20세에 불과했지만 기량은 엄청났다. 스키선수로서 그의 자질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의 기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거기에다 그의 영화배우 같은 용모는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해주었다.

오스트리아 선수단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프레드 뢰스너(Fred Roessner) 교수를 통해 수준 높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대표단은 3개의 금메달을 포함하여 9개의 메달을 휩쓰는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었다.

토니 자일러의 실력발휘는 1월 29일 몬테 팔로리아에서 벌어진 대회전 경기부터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팀은 당장 승리를 일궈냈다. 자일러는 같은나라 출신의 2위 몰터러(Molterer)와 3위 슈스터(Schuster)를 여유 있게 앞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틀 후에는 회전경기가 벌어졌다. 악천후와 그로 인해시계가 좋지 않은 상황 속에 드루스치고개 코스에서 출발신호가 떨어졌다. 경기는 두 단계로 치러졌다. 자일러는 일본선수 이가야 지하루를 4초 차이로 물리치고 두 번째 금메달을 차지했다. 3위는 스웨덴 대표인 솔란데르(Sollander)가 차지했다.

마지막 경기인 활강은 토파나 고지에서 출발했다. 올림픽 코스는 험난한 데에다 얼어붙어 있었다. 경기가 열리고 보니, 선수들이 이번 활강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납득이 갔다. 출발선상에 섰던 75명 가운데 47명만 주행을 마쳤다. 이가와 지하루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토니 자일러는 기술과 체력을 바탕으로 끝까지 견디며 스위스의 펠레와 같은 나라 출신이며 이미 대회전에서 은메달리스트인 몰터러를 제압했다.

이렇게 해서 토니 자일러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활강과 회전 그리고 알파인 복합경기를 석권하여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많아 배우로 데뷔했다. 그 때문에 아마추어자격을 의심받아 이후의 올림픽에 참가자격을 상실했다. 그의 선수경력은 24세에 끝이 났다. 하지만 이 보기 드문스키선수는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 코치로서 자신의 재능을 바쳤다.

이번 대회에 소련팀이 참가함으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은 오슬로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땄던 빙속에서 오직 1개의 금메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런 몰락의 주된 이유는 특히 25세의 예프게니 그리신이라는 젊은 선수 때문이었다. 사실 코르티나담페초에 오기 전, 소련의 빙속 대표팀은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들은 미주리나 호수와 비슷한 특징을 갖고고도도 비슷한 카자흐스탄에 있는, 해발 4.951m 탈가봉가까이 있는 호수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았다. 그런 결과 코르티나대회에서 예프게니 그리신이라는 빙속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성공이 시작된 것은 1월 28일 부터였다. 그날, 빙속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500m를 겨루기 위해 미주리나 호수 경기장에 모여들었다. 이미 40초 2/10의 세계기록을 보유한 젊은 러시아선수는 마음껏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자신의 세계신기록과 같은 기록을 보여 올림픽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같은 나라 출신인 그라치가 2위, 노르웨이 출신의 예스트방이 3위를 차지했다.

1월 30일 또 다시, 1,500m 경기가 벌어졌을 때, 그는 같은 나라 출신인 미하일로프(Mikhailov)와 동률 2분 8초 6/10을 기록하여 생모리츠에서 노르웨이 출신의 파스타드(Farstad)가 앞서 세운 2분 27초 6/10 기록을 갈아치우며 금메달을 땄다. 또 다시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은 핀란드 출신의 토이보 살로(Tovo Salonen)이 1초 차이로 3위에 오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노르웨이 안데르센 선수가 모든 경기를 석권하며 올림픽기록을 세우게 될 것이다.

1952년 오슬로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뉴튼센터 출신 텐리 올브라이트(Tenley Albright) 선수는 영국의 자네트 알트웨그에 이어 2위에 만족했어야 했다. 이후로 그녀는 여자 피겨스케이팅 올림픽타이틀을 정복하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를 해왔다. 참고로 텐리 올브라이트는 11살 때에 척추소아마비에 걸렸지만 다행히 후유증은 겪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이 열리는 돌로미티로 향하기 몇 주 전에 그녀는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오른쪽 발목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외과의사인 그녀의 아버지가 치료와 재활운동에 온 힘을 기울인 덕분에 사고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체력을 바탕으로 결국 그녀는 끄떡없이 경기장에 들어서서 같은나라 출신인 캐럴 하이스와 겨루었고, 11명의 심판가운데 10명이 그녀에게 우승판정을 내렸다. 그녀로서는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 되었다. 의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하버드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외과의사가 되었다. 캐럴 하이스 또한 텐리 올브라이트가 밟은 길을 따라, 이번 대회 2위에 이어 다음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대회는 2월 5일에 막을 내렸고, 모든 참가 선수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환대와 그들의 쾌활한 성격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종합성적은, 소련이 금 7, 은 3. 동 6등 모두 16개의 메달로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오스트리아(11개 메달) 3위는 핀란드(7개 메달)가 차지했다. 소련이 참가함으로써 올림픽의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오슬로대회에서 1, 2위를 차지했던 노르웨이와 미국은 각각 7위와 6위로 물러났다.

이번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한 것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었다. 1924년 이후 처음으로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어느 한 나라도 2위에 들지 못했다. 그나마 핀란드는 중간도약대 특별점프에서 두개의 메달을 차지하고 금메달도 땄다. 여기서도 강세를 지켜오던 노르웨이는 모두가 1952년 홀멘콜렌도약대의 버거만과 팔캉에르의 점프를 기억하지만, 처음으로 타이틀을 내주었다.

피겨스케이팅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남자 우승자인 미국선수 헤이스 앨런 젠킨스의 동생이 시상대 3위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오스트리아와 소련이었다. 토니 자일러는 3개의 타이틀을 차지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이 같은 실력을 발휘한 것은 1968년 프랑스 선수인 장-클로드 킬리(Jean-Claude Killy)가 유일하다. 아이스하키에서 소련팀이 캐나다팀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사실 또한 눈에 띄는 일이다. 끝으로 이번 대회에서 동계올림픽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선수인 47세의 프란츠 카푸스(Franz Kapus)가 참가한 스위스 봅슬레이팀이 4인조경기 우승을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오슬로에서 받아온 올림픽 깃발은 1960년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미국의 스쿼밸리 시장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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