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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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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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과 스콜라의 체육


중세는 신앙의 시대로서 모든 학문을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한계 내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학문의 주류는 신학이었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였다.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스콜라'라는 부설학교를 운영했고, 그것은 후일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교육체계 속에서 스콜라 철학이 체계화되었으며, 스콜라의 교육체계 속에서 체육은 교육의 중요한 영역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같이 인간의 발육을 위해 운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진 스콜라 철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지나치게 지적 측면에 치우친 나머지 편견에 사로잡혀 신체 활동의 의미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중세 기사의 체육


기사와 기사도


기사(Knights)란 넓은 의미에서는 평기사에서 국왕에 이르기까지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기사도(Chivalry)란 말은 지배계급인 귀족 집단의 도덕과 예의범절을 포함한 행동규범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의 봉건적 규범이었던 것이다.

기사의 주된 임무는 전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맹과 무력, 영주에 대한 충성과 신의였다. 기사제도(chivalry)는 봉건제도(feudalism), 영주제도(manorialism)와 함께 중세 유럽 사회상을 상징하는 제도적 틀 중 하나였으나 봉건제도의 붕괴와 함께 기사제도도 붕괴되었다.

기사 체육의 목적


평기사의 주된 임무는 전쟁, 즉 군사적 임무였고, 체육활동은 기사 교육과정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기사 체육은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기사들의 단련을 위하여 채용되었던 각종 무예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와 교회의 수호를 위한 전투력의 배양 수단이었으며, 체육의 목적은 전투력의 강화와 기사도의 수련이었다.

기사 체육의 내용


기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신체적 훈련을 받았다. 기사 체육의 중심이 된 것은 승마, 수영, 사격(궁술), 검술, 수렵, 서양장기(chess), 작시(詩) 등 소위 7예를 비롯하여 기마술, 창던지기, 달리기, 도약운동, 레슬링, 로프 오르기, 줄사다리 타기, 곤봉, 목검 훈련, 장거리 달리기 등 다양하였다. 특히 무장한 상태로 마구(馬具)를 이용하지 않고 말에 뛰어 오르거나 뛰어내리기를 하는 등 마술(horsemanship)은 매우 중시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중세 기사제도가 남긴 대표적인 신체 문화는 토너먼트(tournament)나 쥬스트(joust)와 같은 마상시합(馬上試合)이었다.

기사의 운동경기


중세의 기사란 지배계급을 통칭하는 말이었고, 중세 봉건사회에서 귀족 계급에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군사적 의무였다. 그러한 상황속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게임은 토너먼트나 쥬스트였다.

토너먼트는 소규모의 기병전처럼 3~40명의 기사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정렬한 다음, 나팔소리에 따라 제1열에 선 기사들이 돌진하여 격전을 벌이고, 다음 나팔소리가 나면 제2열의 기사들이 격돌하여 벌이는 모의전 형태의 경기였다. 토너먼트는 11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경우 12세기 경 리처드 1세(Richard I)가 프랑스로부터 도입한 이래 12~13세기에는 귀족의 일반적인 유희로 성행하였으며, 토니 (tourney)란 이름으로 16세기까지 이어졌다.

토너먼트의 한 유형으로서 중세 기사의 경기로 뚜렷한 형태를 갖춘 것은 쥬스트(joust)와 멜리(melee)였다. 쥬스트는 마상 시합에서 말을 탄 2명의 무장 기사가 긴 목검으로 벌이던 마상 검술 대결이었다. 쥬스트와 유사한 형태의 멜리는 말을 타고 하기도 했으나 주로 육상(上)에서 집단을 이루어 무딘 검으로 벌이던 난투전(亂鬪戰)이었다. 그 외 배리어(barries), 빠담뭐(pas d'armes), 아우트런스(outrance), 퀸테인(quintain), 비아우어드(behourd) 등과 같은 유사한 경기들도 있었다.

기사 체육의 체육사적 의미


중세 수도원의 교육 내용은 7개의 자유교과(Seven Liberal Arts), 즉 문법, 수사, 논리, 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 등과 같은 교양교과였으나 체육은 포함되지 않아 체육의 암흑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중세사회에서도 사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과 용기, 전투력을 지닌 집단이 필요했고, 기사제도로 인해 기사의 승마, 수영, 사격(궁술), 검술, 수렵, 서양장기(chess), 작시(詩) 등 소위 기사의 칠예藝)와 같은 체육활동이 장려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사체육은 고대 체육의 맥을 근대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체육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중세 중국의 체육


중국의 삼국(三國), 진(晉),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남북조(南北朝)시대는 왕조가 계속 교체된 전쟁의 시대였다. 따라서 각국은 부국강병책을 썼고, 그러한 영향으로 궁술, 검술, 승마, 권법 등이 발달되었으며, 수(隋)나라, 당나라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승마


승마는 어느 대륙,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귀족들의 중요한 이동수단이었으며, 전쟁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중세 중국에서는 승마술이 발달되었으며, 특히 당나라 시대에는 관리 채용을 위한 무거(武擧)가 도입되어 있었다. 당대의 무거 평가 항목에 기사(騎射), 기창(騎槍), 중량거(重量擧), 중량물운반(重量物運搬), 체격(體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궁술


중세까지는 궁술이 수렵이나 전쟁을 위한 대표적인 도구이며, 무기였다. 당나라는 통일을 달성하였으나 북방 기마민족들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기사(騎射)에 능한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히 궁술이 장려될 수밖에 없었다. 왕실에서는 궁술을 장려하였고, 군인들은 궁술훈련이 필수였다. 예컨대 당나라의 태종은 명사수 100명을 선발하여 백기(百라고 칭하였다.

의료 및 무예 체조


중세 중국에는 다양한 무술이 발달되었으나 그 정확한 기원을 찾기는 어렵다. 중세 중국의 대표적인 무예는 소림사권법이었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하남성(河南省) 소림사(少林寺)에서 법(法)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이 권법을 창안하였다. 그 이후 여러 세대를 지나 소립사의 나한지권(羅漢之拳)은 점차 수학(修學)을 기본으로 하는 북방선의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잇단 병화(禍)와 폐불정책(佛政策) 등으로 인해 소림사는 쇠멸하고, 수업 승들은 산문(山門) 밖으로 흩어지면서 소림사의 권법은 자연스럽게 민간 사회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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